절강시씨의유래

1. 절강시씨 개요(槪要)
절강시씨는 중국(中國)에서 유래(由來)된 한국의 성씨이다. 공자(孔子)의 제주 중 한 사람인 시지상(施之常)의 후예라고 전(傳)한다. 우리나라 시씨(施氏)의 시조(始祖) 시문용(施文用)은 명(明)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조선에 귀화(歸化)하였다. 시문용은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郎)을 지낸 시윤제(施允濟)의 아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행영(行營) 중군(中軍)으로 참전했던 무장(武將)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하지 않고 경상도 성주(星州)에 정착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의 인척인 합천군의 창녕인 장함(張涵)의 딸과 혼인하여 시영건(施永建)과 시영달(施永達)을 두었다.

2. 시문용(施文用)의 풍천재(風泉齋)와 유허비(遺墟碑)
풍천재(風泉齋)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머물러 귀화한 절강시씨 시문용(施文用)과 절강서씨 서학(徐鶴)을 기려, 깊고 한적한 산 속에 1834년(순조34) 사림에서 건립한 재실이다. 그 이듬해 1835년에 유허비(遺墟碑)도 풍천재 입구에 나란히 세워진다. 풍천재는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1258번지(문명1길 198-6)에 있다. 풍천재에 모셔진 시문용과 서학의 조선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풍천재 기둥의 주련(柱聯)이 잘 묘사해 준다.

3. 성주(星州)의 대명동(大明洞) 마을과 대명단(大明壇)
시문용은 임진왜란 때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남방위(藍芳威) 휘하의 행영(行營) 중군(中軍)으로 종군하여 7년동안 각지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올렸으나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歸化)했다. 서학(徐鶴) 역시 대도독(大都督) 마귀(麻貴)와 유격(遊擊) 중군(中軍) 시문용과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란(戰亂)이 끝날 무렵 성주군 용암면 대명동에 함께 정착(定着)하였다. 성주군 용암 깊은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작고 외진 이 마을이 천병 장수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대명동(大明洞)이 되었다.
풍천재와 유허비(遺墟碑) 뒤편 군성산에 시문용이 조국 명(明)나라를 그리며 쌓은 제단(祭壇)인 대명단(大明壇)이 있다. 명(明)나라가 멸망하고 청(淸)나라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명나라의 재기(再起)를 기원하며, 조복(朝服) 분향(焚香) 망배(望拜)하던 곳이다. 두사충(杜思忠)도 대명단을 쌓고 명나라를 향해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그 대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성주군 용암명 군성산에는 뚜렷하게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산능선을 타고 풍천재 뒤쪽 숲 사이를 잠간 걸어면 ‘대명단(大明壇)’ 세 글자의 선명한 제단(祭壇)이 보인다. 가로 4M, 세로 3M, 높이 1M 쯤 되는 돌로 쌓은 제단이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이 제단 앞에서 북망배례의 예를 올린다. 망배 때 올리는 제물은 그날이나 지금이나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이다.

4. 임진왜란(壬辰倭亂) 공(功)으로 정3품 벼슬 받은 시문용(施文用)
정신(鄭藎)의 『풍천재기(風泉齋記)』에 내용이 실려 있다. 선조(宣祖)가 시문용의 전공을 포상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除授)하셨다. 그는 군사 뿐아니라 풍수(風水)와 의술(醫術)에도 능하여 1616년(광해8)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을 받아 성지, 김일룡 등과 함께 궁궐(宮闕) 및 왕릉(王陵) 축조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면서 반정세력에 의해 추방당하게 된다. 그 후 1637년(인조14)에는 청(淸)이 조선에 살고 있는 명(明)나라 장수들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시문용은 외ᅟᅵᆫ 골짜기를 찾아 더욱 깊이 은거한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성주군 용암면 대명마을이다.
조선의 조정(朝廷)이 시문용의 후손들을 비롯한 명(明)나라 유민(遺民)들에게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영조(英祖) 때부터이다. 암행어사(暗行御史) 박문수(朴文秀)가 명나라 유민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조사해 임금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영조는 뒤늦게나마 시문용에게 병조참판(兵曹參判) 직(職)을 추증(追贈)한다. 그의 후손들은 일체의 조세(租稅)와 부역(負役)을 면(免)한다는 교지(敎旨)도 함께 내렷다. 정조(正祖)는 1793년(정조17) 시문용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기도 하였다. 일제(日帝)가 이 땅을 강점(强占)한 36년 동안 절강시씨는 또 다른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수들의 후예들에게 상상 질시와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후손들은 말한다. 의학(醫學)과 병법(兵法), 풍수(風水)에 『의복결유』, 『병학기정』, 『감여지남』 등의 저서를 남겼다.

5. 절강시씨 인구(人口), 유적지(遺蹟地), 인물(人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시씨(施氏)는 2,235명(대구970명, 경북314명)으로 나타난다. 이 중 본관을 절강(浙江)으로 명확히 표기한 인구는 2,011명이며 대구에 920명, 경북에 291명이 있다.
경북 성주군에는 풍천재 외에 모명재(慕明齋)라는 또다른 시문용 재실이 성주군 수륜면에 있으며, 고령군 운수면에도 염수재(念修齋)와 명촌공 별묘(別廟) 그리고 같은 면에 내화재(迺華齋)가 있다. 명촌공 시문용의 묘는 성주군 수륜면 형곡 성주산에 있으며,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정부인(貞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 묘는 고령군 운수면 대평동에 있다. 선대묘원을 조성하여 아들 시영건과 자부 팔거도씨(八莒都氏), 시영달과 자부 야성송씨(冶城宋氏) 묘는 동원 동좌이며, 교지(敎旨)와 문적(文籍) 등이 전한다.
가맥(家脈)을 이어온 인물로는 영조 때 훈련원 주부를 지낸 시유정(施有鼎),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시유영(施有榮)이 유명했으며, 아들 시한익은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첨정에 올랐다. 손자 시치하(施致厦)는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현대의 인물로는 시명선(企業人), 시문한(判事), 시정기(辯護士), 시윤준(대구지방법원 등기국장), 시경준(한의학 博士), 시석준(물리학 博士), 시진권(總警), 시옥진(敎授), 시진철(88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시진호(치과병원장), 시종수, 시성철, 시진우(金融人), 시희준, 시병석(기초의원), 시병호(소년원 원장), 시옥희(배상문프로골퍼 모친), 시선준(병신보 편찬위원장), 施賢(宗孫), 시재기(大宗會長) 등이 있다.
1979년 절강회가 조직되었고, 1984년 절강시씨대종회가 조직되었다.